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민주적 사회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

민주적 사회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

:공산주의, 자유주의, 사회민주주의 - 차이와 쟁점 [2]



홍준기(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 연구소)



 앞의 시리즈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 가진 문제점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.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면 이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.


공산당 선언 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의 독해가 가능하다 . 하나는 마르크스 - 레닌주의적 독해로서 폭력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나아간다는 내용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. 두 번째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폭력 이라는 표현을 완화해서 읽는 방법이다 . 마르크스가 난잡한 폭동 그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 공산당 선언 을 읽으면 , 그리고 더 나아가 폭력혁명과 더불어 총체적 국유화 계획경제 노선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회민주주의적 태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, 공산당 선언 은 글자 그대로 사회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읽힐 수밖에 없다 . 좀 길지만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제시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인용해보자 .

1) 토지 재산을 폐지하고 , 모든 지대를 공적 목적에 충당하는 것 .
2) 무거운 누진 소득
3) 모든 상속권의 폐지
4) 모든 이민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 몰수
5)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
6) 통신 및 운송 수단을 국가의 손안에 집중시키는 것
7)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도구를 확대하고 , 공동 계획에 따라 황무지를 개간 경장하고 토양 일반을 증진시키는 것
8) 모든 사람이 동등한 노동의 의무를 지는 것 . 산업 군대 ,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 군대를 세우는 것
9)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, 나라 전체에 걸친 보다 균등한 인구 분산을 통해 도시와 동촌의 차이를 점차 제거하는 것 .
10) 모든 아동을 공립학교에서 무상교육을 시키는 것 , 현재의 행태로 이루어지는 아동의 공장 노동을 폐지하는 것 , 교육과 산업의 생산을 결합시키는 것 등등 .
( 마르크스 , 엥겔스 ( 권화현 옮김 ), 공산당 선언 , 펭귄클래식 코리아 , 254~55 )
 
마르크스가 제시한 내용 중 총체적 국유화 혹은 극단적 평등주의 등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, 그가 말한 공산주의 정책은 진보한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오늘날 이미 역사적으로 현실화되어 실현되지 않았는가 ? 나라마다 내용상 , 정도상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.
 
당연한 이야기이지만 ,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후퇴하는 경향이 현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,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고쳐가야 할 불행한 사고 일 뿐이다 . 그러한 사태가 사회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공산주의가 옳다 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.
 
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?
 
하지만 여전히 생각해보야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. 마르크스 - 레닌주의자나 ( ) 자유주의자들처럼 사회민주주의를 완전히 폄하하지는 않지만 ,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다 .
 
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 라는 용어이다 .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이론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, 즉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학문적 토론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,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두 용어는 사실상 동의어처럼 느껴질 수 있다 .
 
하지만 이 두 용어는 겉보기보다는 더 큰 차이를 갖고 있다 . 특히 윤도현 교수의 장미 강좌에 대한 청강후기의 제목에서처럼 < 사회민주주의 : 복지자본주의인가 ,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> 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문구에서 더욱 그러하다 .
 
물론 이 강좌는 ( 적어도 이 강좌의 청강후기는 ) 사회민주주의가 결국은 자본주의에 불과하니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. 하지만 이 청강 후기는 사회민주주의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민주적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?
 
나는 이러한 논리가 현실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별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.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자 .
 
예를 들면 게지네 슈반 (Gesine Schwan) 은 민주적 사회주의 개념을 보수적인 기독교적 사회주의자 , 사회민주주의 우파 ,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자 모두를 포괄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(Gesine Schwan, 유럽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, 윤근식 편저 , 사회민주주의론 참조 ).
 
게지네 슈반의 용법에 따르면 민주적 사회주의는 비민주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말이다 . 그리고 슈반은 민주적 사회주의 중에서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자는 민주주의와 독재간의 대립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 ”(197 ) 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. 이러한 용법에 따르면 소위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이고 , ‘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분파가 되는 것이다 .
 
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인가 ? 게지네 슈만의 용법에 따르면 민주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동조하면 결국은 모두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다 .
자본주의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도 민주적 사회주의자이고 , 좀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도 그러하다 . 게지네의 논문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.
 
사회주의의 의미는 무척이나 다양하다
 
왜 이런 말장난 같은 이야기로 끝나는 것일까 ?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,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. 사회주의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,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, 심지어 국가사회주의도 있으며 , 과학적 사회주의도 있다 . 심지어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 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, “ 반동적 사회주의 ”, “ 보수적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”, “ 비판적 -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를 제시하고 이것들을 비판한다 .
 
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나마 비판적 -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공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름 긍정적 요소도 있다 . 어쨌든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, 마르크스는 비판적 -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언급하면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. 반면 궁극적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최종 목표 에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.
 
이렇듯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이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심지어 슘페터는 자본주의 , 사회주의 , 민주주의 라는 저서에서 용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총체적 사회화를 달성한 사회 를 지칭하는 개념으로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.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동의어라고 덧붙인다 . 차라리 슘페터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용어상의 다의성으로 인한 사유의 혼란 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.
 
복지 자본주의가 아니라 혼합경제
 
그렇다면 < 사회민주주의 : 복지자본주의인가 ,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> 라는 문구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? 바로 그 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. 사실 그 문구 자체가 모호한 것은 아니다 .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복지 자본주의로 끝나지 않으려면 민주적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 , 복지자본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, 즉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? 이 점이 모호한 것이다 .
 
사실 사회민주주의의 내용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. 사회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뭐냐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, 사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쓴 여러 책들만 보아도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. 나라마다 다소 다르지만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는 분명한 공통적인 지향점과 실천을 갖고 있다 .
 
그렇다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최종 목표를 이야기하면서, 그에 반해 사회민주주의의 궁극적 지향점이 복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고 폄하하여 말한다면 다시금 혼란이 일어난다 .
 
우선 '복지 자본주의'라는 표현은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사이의 차이 ( 이 차이는 매우 크다 !) 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. 에스핑 - 엔더슨에 따르면 복지국가에는 자유주의적 ( 시혜적 , 잔여적 ) 복지국가 , 유럽 대륙형 ( 조합주의적 ) 복지국가 , 그리고 북유럽형 ( 보편주의적 ) 복지국가가 있다 . 다시 말해서 , 복지 자본주의라는 것도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 이다 ( 에스핑 - 엔더슨 ( 박시종 옮김 ),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,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, 2007 참조 ).
 
정확하게 말하자면 , 진보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를 혼합한 , 즉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수반하는 혼합경제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.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는 식의 이분법적 논의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가 자본주의 경제(복지를 조금 가민한)가 아니라 혼합경제라는 점을 완전히 시야에서 놓치고 있다 .
 
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?
 
그러므로 < 사회민주주의 : 복지 자본주의인가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> 라는 말이 ,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불과하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결국 민주적 사회주의 , 즉 슘페터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( 즉 공산주의 ) 를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,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.
 
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공산주의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실현된 공산주의 인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건너 뛸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폄하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.
 
윤도현 교수 청강후기의 저자는 나 개인적으로는 윤도현 교수 역시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표를 복지 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 실현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서 상당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고 밝히고 있는데 , 나는 청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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